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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수필

나에게 종교란 무엇인가

by 댄초이 2021. 4. 8.

믿음이란 영역

한국인으로서 종교에 대해 편히 말할 수 있는 기회는 그리 많지 않다.

당연하다. 종교는 믿음의 영역이다. 남의 믿음에 대해 내가 왈가불가하는 순간, 자기 앞가림도 못하면서 남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오지랖 넓디넓은 인간으로 추락해버린다.

 

타인의 종교나 종교관에 대해 논평하는 대신, 나 자신의 종교와 관련된 삶의 이야기들을 적어보려 한다. 내가 가진 경험치 중에 남보다 조금 더 다채롭다고 생각되는 것은 단연 종교 관련이다. 그렇다고 내가 종교적인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다. 나 같이 의심 많은 사람이 종교인이 되는 것은 거지가 저축왕 되기보다 어렵다. 

 

긴 글이 되지 싶다. 

내 글을 정독해서 읽는 사람은 없을 테지만, 나로서는 내 인생의 소중한 이야기를 토설해놓는다는 것에 그 의미를 찾겠다. 혹 이 글의 일부라도 읽는 분들에게 종교에 대한 생각거리를 안겨준다면 정말 기쁘겠다.

 

교회 다니시는 분들이 제 글을 읽고 눈살을 찌푸릴 에피소드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미리 밝혀드리며 미리 바다와 같은 넓은 마음을 내어주길 부탁드린다. 종교에 관해서만큼은 당신들은 한국사회의 주류 아닌가! 나 같은 비주류인의 설움 섞인 불만을 너그러이 봐주기를 기대한다. 

 

 


공군 지원, 기관정비병이 얼떨결에 군종병으로 픽업

공군을 지원해서 갔다. 육군 26개월에 비해 4개월이나 긴 30개월이지만, 편하다고 해서 지원했다. 나중에 병장 계급을 달고 복무 26개월이 지난 이후에 살짝 후회가 왔다. 그냥 육군 갈 걸 그랬다. 

 

공군은 확실히 편했다. 훈련소에서도 상대적으로 편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행군이나 유격훈련이 없고, 가장 힘든 훈련이 무장하고 5km 거리 구보 정도였다. 그래도 훈련소는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쉬운 곳은 아니다.

 

4주 훈련 뒤, 6주 정비 이론교육을 받았다. 기술교육이나 실습은 전혀 없었다. 책상에 앉아서 뭔가를 배웠다. 기계공학 출신자라고 비행기 엔진정비 쪽 특기를 받았다. 오해 마시라. 전투비행단에 자대 배치받고 정비병으로 딱 3개월 근무했지만, 비행기 근처도 못 가봤다.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고작 엔진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을 받는 꽁무니 기체 부품 중에 크랙, 즉 가느다란 실금이 간 게 있으면 그걸 찾아 동그라미 치는 게 전부였다. 따까리 중의 따까리인 셈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사실 나는 기계치다. 

 

정비병으로서 가장 힘든 것은 내 열 손가락 손톱 좌우 살이 갈라지는 고통이었다. 엔진오일과 기름이 잔뜩 묻어있는 부품 덩어리를 잡고 크랙이 난 곳을 찾아 체크하다 보면 내가 끼고 있는 소위 목장갑이라는 것은 별무소용이 없었다. 기름이 내 손톱과 손가락 끝 살 사이를 날카롭게 이간질해놓았다. 내 열 손가락에는 항상 밴드가 붙어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갈라진 살 틈에 노출된 살 때문에 계속 인상을 쓰게 되었다. 정비병에게 제대로 된 장갑 하나 주지 않는 한국 군대였고 그나마 목장갑도 매일 빨아서 써야 했다.   

 

그런 내게 천재일우의 기회가 찾아왔다. 정신적으로 힘든 쫄병(이등병) 시절에 주말이면 선임병 따라갔던 법당으로 근무지를 옮긴 것이다. 기존 법당 근무자(상병)가 법사님(=동국대 불교학과 석사 출신)의 눈밖에 나, 대신할 신참 이등병을 물색하던 법당 총무님(=정비특기 직업군인, 상사) 눈에 내가 띄었다.

 

'너 법당 근무할래?'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짧게 심호흡 한 번 하고, '네, 하겠습니다' 하고 힘주어 대답했다.  

 

나는 내무반 바로 위 고참 선임들에게 살짝 찍혀있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내가 말을 안 듣는 티가 얼굴에 잔뜩 묻어났다고 한다. 인정한다. 솔직히 군사문화가 너무 싫었다. 90년대 초중반의 군대는 구타가 사라진 지 얼마 안 된 때였고, 아직까지 권위주의 군사문화가 쩌렁쩌렁할 때였다. 나보다 한 살 많거나 동갑이거나 심지어 두 살이나 적은 인간들이 고작 몇 달 혹은 몇 년 일찍 군대에 들어왔다고 나를 노예 취급하는 군대문화가 정말 싫었다. 조폭문화와 다를 바 없었다. 군인 출신 대통령이 막 끝나고 김영삼 대통령이 자리에 오른 때였다.  


군종병 생활

길게 쓰려고 한다. 남이 못하는 경험을 2년 반이나 했기 때문이다. 

 

군종병 생활은 나의 삶에 많은 경험을 안겨주었다.

군종병이란, 군에서 종교시설에 근무하는 병사를 이르는 말로 따로 특기교육을 받는 게 아니라, 자대 배치받은 일반 병사들 중에 운 좋은 친구들이 선택받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 틀린 말이다. 운 좋은 장병들이 선택받는 것이 아니고, 크거나 작은 뒷배로 들어오는 낙하산 투하 자리였다. 나같이 뒷배없이 픽업된 경우는 드물다.

 

내가 있던 시절에는 교회나 성당이나 법당이나 할 거 없이 다 크고 작은 배경을 이용해서 군종병으로 낙점받았다. 나의 법당 후임은 내가 제대하기 4~5개월 전에 들어왔는데, 우리가 속한 전투비행단장(준장, 천주교 신자)의 친구 아들이었다. 내가 일병 때, 3개 교단(교회, 성당, 법당)의 업무 지원 명목으로 새로운 부서가 하나 생기더니, 역시나 낙하산으로 온 친구가 그 자리에 앉았다. 그 시절 한국사회는 어디나 다 그랬다. 백 없는 놈은 그냥 찍소리 말고 당하는 그런 시대였다. 과장이 아니라 진짜다.  

 

작은 공군 비행단 안에는 교회, 성당, 법당이 모두 있다. 전 세계적으로 아마 사례가 없을 거다. 이렇게 3개의 종교가 평화를 이후며 서로 사이좋게 공존할 수 있다니. 그런데, 실상 그 내부를 살펴보면 꼭 그렇지도 않았다.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다. 내 경험치만 이야기하겠다. 

 

신부님과 법사님은 술친구

제목 그대로다.

 

내가 군종병으로 생활한 25개월 동안 두 분의 법사님을 보좌했고, 두 분의 신부님을 뵈었다. 법사님과 신부님은 비행단에서 가장 친한 절친이었다. 절친이라기보다는 술친구였다. 아마도 비행단 내에서 서로 민간인 멘탈을 가진 유일한 두 분이 아닐까 싶다. 아! 물론 목사님도 계신다. 

 

 

아래에 왼쪽부터 법당, 성당, 교회 군종병이며 맨 오른쪽이 군종실 행정병, 사복입은 분들은 왼쪽부터 목사님, 신부님, 법사님이시다. 

 

의아해하실 거 같다. 성직자들이 왜 술을 드시냐고. 나도 모르겠다. 변명하자면 법사님은 스님이 아니다.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학사와 석사를 마친 사람들로 스님이 되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기본적으로 학문으로서 불교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이다. 신부님과 스님은 약간의 술은 다들 하시는 걸로 안다. 취하지 않을 정도로만.  

 

내가 생활한 25개월간 신부님과 법사님만 친한 게 아니라, 군종병들끼리도 절친으로 지냈다. 서로의 종교를 존중했다. 대화 중간중간에 유치한 종교 논쟁도 벌였다. 짧은 지식으로 막말을 해도 서로 이해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목사님이나 교회 군종병은 우리들과 섞이려 들지 않았다. 내가 겪은 그 시절, 목사님 뿐 아니라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우리 법당 안으로 발을 들이면 큰 죄를 짓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성당 식구들과도 상당히 냉랭하게 지냈다. 


성탄절에 내가 두 번째로 모셨던 법사님이 10만 원이 든 금일봉을 행사에 쓰시라고 교회와 성당에 전달하셨다. 당시에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몇 달 뒤, 부처님 오신 날이 다가오자 신부님은 직접 오셔서 법사님과 차 한잔 하시면서 돈봉투를 놓고 가셨다.

 

교회에서는 한 하사관을 보내서 돈봉투를 내게 전달했다. 그는 절 마당으로 절대 들어오려 하지 않았다. 전화로 내게 대뜸 절 밖으로 나와 달라고 했다. 완만한 언덕배기 찻길을 내려가 돈을 받았다. 군기 빠진 경례를 붙이고 돈 봉투가 내 손에 쥐어지고 그 하사관은 곧 차를 출발했다.  

 

교회의 절 무시는 내가 법당에 복무한 24~25개월 동안 꾸준히 계속되었다. 소소한 작은 일들에서 열을 받았다. 그때 나는 혈기왕성한 20대 초반이었는데, 마음은 항상 열이 받아 있었다. 

 

 

교회의 돈 문화에 놀라다

교회의 군종병들과는 사무적으로만 만났다. 사람들은 착해 보였다. 

 

맨 처음 교회를 방문했을 때 내 눈을 의심케 하는 것을 목격했다. 

 

공군 비행단 내 기지의 가장 좋은 자리에 턱 하니 자리 잡은 교회 건물 출입구 바로 옆에 A4용지 몇 장이 연이어 붙어있었다. 컬러로 프린트된 그래프였는데, 눈에 확 띄라고 붙여놓은 모양새였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가로축에는 사람 이름이 적혀있고 세로축에는 금액이 적혀있었다. 그래프 타이틀을 봤다. 지난주의 헌금 액수였다. 경악했다. 

 

개신교에 안 좋은 감정을 가지다

석가탄신일을 한 달여 앞두고 전투비행단 중앙에 있는 아담한 저수지 가운데에 동자승과 연꽃 모양의 큰 행사 알림용 튜브를 띄워두었다. 어느 날인가, 한 신도님(하사관)이 법당에 전화하셔서 연못 중앙에 있던 그것이 가장자리 구석으로 치워져 버렸다고 알려왔다. 법사님께 알리고, 신도회장님(중령, 비행장교)께 알렸다.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지 수소문했고, 교회 신자인 한 직업군인(=하사관인지 장교인지는 기억에 없다)이 자신이 그랬다고 자랑스럽게 대답했다고 한다. 눈에 거슬려서 그랬다고 한다.

 

그 당시 비행단장은 교회 신자였다. 우리는 분을 삭일 수밖에 없었다.  


제대할 때까지 두 번의 석가탄신일 행사를 치렀다. 1~2개월간 정말 바쁜 나날들이 이어진다. 내가 뭐든 다 챙겨서 직접 하든지 단기사병이나 법당 총무님 이하 신도분들께 부탁드려야 했다. 인수인계받은 것도 없이 그냥 했다.   

 

나의 법당 근무자로서의 첫 석가탄신일에 전투비행단장(=준장, One star)은 개신교 신자였다. 법당에 아무런 지원이나 해를 끼치지 않았다. 

 

두 번째 석가탄신일에 전투비행단장은 천주교 신자였다. 석가탄신일 행사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전투비행단 기지 전체를 법당 신자들과 가족들이 손에 연등을 들고 행진하는 연등행사다. 일반 사병들도 내무반 밖으로 나와서 구경했다. 천주교 신자이신 전투비행단장은 신부님, 법사님과 나란히 행렬의 맨 앞쪽에서 끝까지 함께 하셨다. 법당 식구 모두 고마워했다. 


군종 사무실이 생기기 전에는 가끔 교회에 뭘 전달하러 가야 되는 일이 생겼다. 교회에서 3개 교단의 통합일을 맡아서 했기 때문이다. 자전거를 세워두고 교회 사무실로 들어갔다 나오는 동안 여러 민간인(=군인가족)들이 나를 스쳐 지나간다. 교회 신자수가 법당의 열 배는 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의 첫 방문 때가 기억난다. 어떤 아주머니(=직업군인 아내)가 내게 물었다.

 

 

"못 보던 사병인데, 어디서 오셨어요?"

 

"예, 법당에서 왔습니다."

 

"어머, 지옥 가 그러면! 천당 가야지! 교회 나와요!"

 

"아~ 저, 저는 절에서 근무합니다."

 

"그러니까 더 교회에 나와야지! 이번 주일에 꼭 나와요! 어떡할라고 그래? 알았지 총각?"

 

".........." 

 

 

이런 일을 교회 갈 때마다 거의 매번 당했다.

 

군종병 생활 루틴

내 남동생은 군대 면제다. 내 처남도 군대 면제다. 나는 당나라 군대보다 더 편한 군종병이었다. 이 글을 읽는 많은 분들께 괜스레 미안하다. 

 

 

연말에 법당에서 일반인들과 윳놀이하는 군기빠진 나

 

군종병 생활은 육체적으로는 정말 편했다. 주로 하는 일은 이랬다. 

 

  • 법사님 식사 만들어 대령하기(6개월만 함)
  • 영수증 챙기기. 간단한 회계장부 적기. 행정서류
  • 토요일 어린이 법회 주도 (법사님 참석 안 하시고 내가 주도)
  • 일요법회: 법회 주도적 진행(법사님 법문 외) 
  • 테니스코트 관리 (법당 소유) 
  • 법당 내외 청소
  • 식료품 구매, 부엌살림 살이
  • 월간잡지 만들기
  • 각종 행사 준비, 진행

 

사진 정말 못 찍는 나의 작품. 읍내 유치원 선생님 두 분의 재능기부 협조를 받아 법당에 나오는 어린이들을 데리고 인근 사찰에서 여름 불교학교를 열었던 걸로 기억한다. 덥고 힘들고 지치고 재미없어서 애들 표정이 뚱하다 

 

오전에 청소 외에 할 일이 별로 없었다.

그 당시 경인지역에만 방송되던 SBS 모래시계가 몇 달 뒤 유선방송을 타고 지방에 재방송되었는데, 나는 법당 사무실에서 오전 시간에 단기사병과 매일매일 봤던 기억이 난다. 정말 군기 빠진 군인이었다. 다른 병사들은 근무할 시간인데, 나는 TV나 보고 있었다.  

 

 

법당에서 열렸던 1995년 송년의 밤 행사. 대부분 하사관 가족들이다. 장교 가족들의 참여는 저조하다. 불교는 장교들의 진급에 도움이 안 된다. 진급에서 자유로운 하사관들만 주로 찾는다.

 

어머니는 내가 혹시나 머리 깎고 산에 들어가서 부모님과 의절하게 될까 걱정되셨다고 한다. 부모가 자식을 더 모른다. 나는 종교인이 될 자질이나 성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리운 보살님들. 지금은 모두 70세 정도 되셨겠다.  

 

법당 구조

잘 지어진 법당 건물의 한 편은 언덕으로 막혀 있고 반대편은 도로와 그 건너편에 사병들의 숙소 및 사병식당이 위치하고 있다. 법당이 내무반을 내려다보는 셈이었다.  

 

법당 건물 앞에는 너른 잔디 마당과 주차장, 차량 진입로가 상당히 길게 뻗어 있었는데, 농구 골대 하나가 놓여 있어서 기지 내 아파트(=장교, 하사관 가족 주거지)의 학생들이 가끔 와서 운동하고 갔다. 겨울에 넓은 마당과 길게 내리막을 이룬 차량 진입로의 눈을 치우는 것이 큰 고역이었다. 법당 마당 오른쪽으로는 밑으로 푹 꺼진 땅에 테니스코트가 하나 있었고, 다행스럽게도 밖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구조였다.  

 

법당 건물 내부를 설명하자면, 신발 벗고 마루에 올라서면 정면에 큰 법당 내부가 있고, 오른쪽으로 법사님이 기거하는 넓은 거실 겸 사무실과 방이 있었다. 왼쪽으로는 내가 주로 머무는 사무실과 부엌이 있었다. 나는 그 사무실에서 일반인들이 쓰는 이불을 깔고 잤다. 별도 건물의 창고도 하나 있었는데 탁구대도 있었다. 창고에서 어느 때인가 야생 고양이가 새끼를 낳고 한 동안 머문 적이 있었다.

 

첫 법사님(6개월)

법사님 두 분을 모셨었는데 첫 법사님이 내겐 무척 고역이었다. 전임 군종병도 이 법사님이 쫓아냈다. 나에게도 시련이 닥쳤다. 신도들(=군인가족)도 두 패로 갈려있었다. 법사님이 생긴 거는 영화배우였다. 

 

법사님 옹호하는 패와 법사님을 싫어하는 패로 나뉘었다.

싫어하는 이유는 법사님이 술을 너무 자주 심하게 마신다는 게 주요 사유였다. 법회도 제시간에 시작하지 않고 예정보다 10~20분이나 늦은 시간에 항상 들어오셨다. 20대 중반의 지독한 권위주의자였다. 겨우 20대 대학원 졸업한 신출내기 주제에 법사가 무슨 큰 어른인 것처럼 행동했다. 나는 법사님을 싫어하는 패에 거의 자동으로 속하게 되었다. 내가 좋아하기 어려운 캐릭터였다.  

 

그러다 큰 일이 터졌다.

 

법사님이 술 드시고 새벽에 자신의 스텔라 차량으로 음주 운전을 하며 법당 안으로 들어와서 주차하다 법당 앞마당에 세워져 있던 두 개의 기중 조각 중 하나를 받아 2미터가 넘는 돌조각 윗부분이 땅으로 떨어져 버렸다. 내가 아침 일찍 청소하려고 나갔다가 발견하고는 급히 총무님께 알렸다. 누가 넘어뜨렸는지 본 사람은 없어도 법사님이 그랬을 거라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다. 두 시간 뒤에 진행된 일요법회 때 긴장감이 감돌았다. 다들 법사님이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해했다. 참고로 당시는 대리운전 개념이 없던 시절이다. 

 

법사님이 붉은색 법복을 갖춰 입고 들어오시더니 자리에 앉지 않고 바로 마이크 앞에 섰다. 무거운 얼굴로 1~2분간 자신을 비방하는 신도들이 왜곡된 이야기를 여기저기 퍼트리고 있다는 요상한 발언을 하시고는 바로 나가더니 차를 타고 법당을 떠났다.

 

곧이어 우리 법당은 신도들의 의지로 '사고 법당'으로 계룡대(공군본부) 행정처에 신고되었고, 다른 비행단의 법사님과 서로 맞교체되었다.  

 

두 번째 법사님(1년 반)

결혼해서 아이까지 있는 학구파 법사님이 오셨다. 나에겐 축복이었다. 

법당에서 주무시지도 않고, 가족이 있는 아파트에서 숙식을 해결하셨다. 나의 첫 번째 골치였던 법사님 식사 준비를 할 필요가 없어졌다. 법사님은 부산에서 고등학생 때 우등생이셨다는데, 3일간의 단식투쟁을 통해 동국대 불교학과 진학을 부모님으로부터 쟁취하신 분이었다. 

 

학구파 법사님은 내게 전임 법사님과 신도분들의 문제를 자주 물어보셨다. 다행히 새로운 법사님은 모든 것을 원만히 잘 해결하셨다. 그분은 전임 법사님과 동국대 불교학과 동기였고 심지어 단짝 친구셨다고 했다. 성향이 완전히 다른데 어떻게 친구가 되셨냐고 내가 여쭌 적이 있다. 대답은 심플했다. 노는 시간대가 같았다고 한다. 새벽 늦게까지 깨어있는 친구는 같은 과에서 그 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전임 법사님은 법회 때, 자신보다 수십 년 인생 경험이 많은 신도분들 앞에서 인생 훈수를 두거나, 영양가 없는 하나마나한 이야기만 했다. 불교 이야기도 거의 하지 않았던 거 같다.

 

새로 오신 법사님은 첫 법회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인생 경험이 일천한 제가 여러 신도분들께 법문을 드리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하여 제가 법회 때 불교 경전을 강의해 드리겠습니다. 첫 번째로 반야심경을 몇 달 동안 강의해 드리겠습니다". 

 

나는 반야심경을 모두 외우고 있었다.

법회 때마다 내가 주도가 되어 반야심경을 암송하고 목탁을 치는 역할을 했기 때문에, 법당 올라와서 가장 먼저 한 것이 반야심경 외우는 것과 리듬과 강약을 맞춰 목탁을 치는 것이었다.

 

나는 스님이 해주시는 강의를 통해 반야심경의 진가를 알게 되었다. 문제는 강의를 들을 때는 이해가 되는데 하루만 지나면 알쏭달쏭했다. 내용이 형이상학적이라 어려웠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칸트 철학만큼 어려울 수도 있는 게 반야심경이다. 40분의 법문 시간에 겨우 8자를 강의하는데 내용이 정말 많고도 깊었다. 

 

예를 들면, 영화 제목으로도 유명한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글귀도 반야심경에 있는데 이 걸 주제로 40분을 떠드신다. 색은 공이요, 공은 색이라는 단순한 반복인데, 색의 의미와 공의 의미를 설명하시면 나는 알 것 같다가도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는 그 언저리에 항상 머물렀다. 

 

내용이 재미있기도 하고 지루하기도 하고 심오하다. 인생 경험이 적은 20대가 공감하기는 쉽지 않은 내용이었다. 내 인생 첫 불교 공부였다. 그전까지는 그냥 군대 편하게 있다 제대하자고 법당에 올라온 군종병이었다.

 

법사님은 군 복무기간을 채우신 후에 하와이대학교 불교학 박사과정 유학을 가셨다고 풍문에 들었다. 지금은 어찌 지내시는지 궁금하다. 

 

 

법당 월간지 제작

심심한 법당 생활의 연속이었다.

 

첫 법사님 시절에 내 몸은 편했지만 마음은 스트레스가 많았다. 두 번째 법사님이 오시고부터는 이제 마음까지 편해졌다. 법사님은 신사적으로 나를 대해줬고, 내 이름을 친근하게 불러주시고, 어린 동생 대하듯이 살갑게 대해주셨다. 점심식사도 아파트에 내려가서 해결하시고, 아침에 출근, 저녁에 퇴근하셨다.

 

법사님이 5시에 퇴근하시고, 단기사병 친구도 퇴근하면, 이 넓은 법당은 온전히 나 혼자만의 세상이었다. 누구는 무섭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는 너무 편했다. 법사님이 퇴근하고 조금 지나면, 사병숙소 쪽에서 식사를 급히 마친 병사 2~3명이 테니스 라켓을 들고 올라온다. 그들과 1~2시간 열심히 테니스를 쳤다.

 

나는 여럿이 함께 자는 숙소 생활을 하지 않았고, 나만의 공간에서 혼자 씻고, TV 보고, PC통신도 하고, 책도 보고, 내 맘대로 원하는 시간에 자고, 내가 원하는 시간에 잠에서 깨었다. 나보다 더 좋은 보직이 또 있을까 싶다. 

 

이런 내 생활에서 무료함이 느껴질 무렵, 뭔가 새로운 것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눈에 출입구 쪽에 비치되어 있던 매달 배달되어오는 불교신문들이며 잡지들이 눈에 들어왔다. 법당 월간지를 만들기로 했다.

 

일은 쉬웠다. 여러 신문과 불교잡지에서 병사들이 좋아할 만한 쉬운 불교 이야기, 불교 연예인 기사, 유명한 고승들의 선문답, 어렵지 않은 불교 교리 등 다양한 코너로 구성, 작은 글씨가 빽빽이 들어찬 잡지를 만들었다. 

 

편집이 끝나면 파일을 들고 시내에 나갔다. 다른 병사들과 달리 나는 쉽게 공군기지 밖을 나갈 수 있는 특권이 있었다. 내가 신청하면 무사통과였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헌병 보초를 지나칠 때도 법당 군종병입니다라고 말하면, 더 묻지도 않았다. 내 권력을 가끔 느끼는 순간 중의 하나였다. 병장이 되어 머리를 좀 기르도 다니다, 모자 밖으로 나온 내 머리카락을 보고 나를 불러 세운 하사관과 장교도 세네 번 있었지만, 내가 소속을 말하면 상황 종료였다.  


공군기지 정문 앞에서 버스를 타고 읍내의 인쇄점에 가서 A3용지에 편집한 것을 출력해서 가지고 왔다. 다른 사병들 같으면 먹을 것도 사 먹고 놀다 들어오겠지만, 나에게 그런 일탈은 별 감흥이 없었다. 바깥 음식을 자주 먹는 편이라 그랬다. 

 

기지로 돌아와서는 프린트한 A3 용지 여러 장을 페이지에 맞게 접고 겹쳐서 스테플러로 중간을 고정시켜서 접었다. 읽는 병사들의 손가락에 상처가 나지 않게 작은 쇠붙이를 꾹꾹 눌러주고, 봉투에 넣어 법회에 참석한 적이 있는 모든 병사들에게 보냈다.  


군대와 종교의 관계

군대 있으면서 사회를 조금 배웠다. 법당에 올라와서 인간사회를 더 폭넓게 배우게 되었다.

선하다고 생각한 법당 내 인간 집단의 알력도 몸소 체감해보고, 종교 갈등도 겪어 보고, 여러 인간 군상들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어린이부터 청소년, 보살님들(아줌마들), 직업 군인들, 일반 병사들, 군종병, 목회자, 장교들 모두와 접촉할 수 있었다. 특권을 누리기도 했다.

 

그전까지 범생이었던 나는 조금씩 인간관계에 눈을 뜨게 된 것이 이 시점이었던 거 같다. 


군대 내에서의 종교의 실질적인 역할을 직간접 체험하는 경험도 여러 번 했다. 정신적인 안정을 준다는 그런 헛소리를 하려는 게 아니다. 

 

90년대 초중반 군대는 좀 그랬다.  

 

  • 불교 군종병과 법사님들의 수련회에 한 번 참석했었다. 숙소에서 쉬는 도중, 건너편 거실에서 법사님(=군종 장교) 몇 분이 모여서 만 원짜리 뭉칫돈을 나누어 각자 주머니에 두둑하게 넣는 모습을 보았다. 법사님 한 분이 내 눈과 마주쳤다. 대낮에 대놓고 돈을 나누어서 제 주머니에 넣는 모습에 불교는 그래도 돈에 관해서는 좀 깨끗하겠지라는 내 짧은 생각은 여지없이 깨졌다. 어디서 흘러들어온 돈인지 모르지만, 여하튼 그 돈은 일부 행정을 맡는 윗대가리 법사님 몇 분의 주머니로 들어간 것이 틀림없다. 다른 법사님들도 알지만 그냥 묵인하는 걸로 생각했다. 관습에 딴지 걸면 바로 왕따 당하는 부패가 만연한 시대였다. 영수증 처리가 허술하던 시대였으니 돈 슬쩍해먹는 방법은 부지기수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 연말정산 시즌이 돌아오면, 직업군인 중, 법당에 이름이 등재된 분들에게 연말정산 공제용 기부 서류를 만들어서 보내드렸다. 부풀려서 올리라는 지시도 있고, 원래 그랬었고, 법사님도 제게 적당히 올려서 만들라고 하셨다. 법사님도 영 내키지는 않지만 그냥 하던 대로 하라고 하셨다. 헌금 금액을 뻥튀기하는 것에 대해 당시 나는 일말의 가책 같은 것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다. 각각의 직업군인들이 법당에 매달 기부하는 금액보다 2배 정도 부풀려서 써드렸다. 개인에게도 배포하고, 계룡대 공군본부 내 군종 사무실에도 자료를 보냈다. 나중에 법사님이 웃으면서 내게 말씀해주셨다. "우리 법당이 올린 헌금 총액이 공군 모든 종교시설 중에 제일 적었다고 하데? 좀 많이 써주지 그랬나!". 나는 쫄보였다. 겨우 2배밖에 안 올리다니.  
  • 군종 관련 사무실에서 작성한 서류 하나를 볼 수 있었다. 거기에는 공군 장군들의 종교가 계급별로 적혀있었다. 지금도 기억이 난다. 그때 자료에 공군참모총장과 준장 1명이 불교신자였고, 나머지 수십 명의 별들은 80%가 교회, 20%가 천주교 신자였으며, 무교는 단 1명도 없었다. 불교 군종장교(법사)들의 이슈는 다가오는 장교들 진급심사 때, 준장 진급 대상인 대령들 중에 불교신자를 많이 배출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그렇게 해야 된다는 것을 전제로, 결론은 해당 자료를 불교신자인 공군참모총장 측에 비공식적으로 전달하는 것이었다. 실제 그렇게 되었는지, 장군 진급 결과가 어땠는지는 나는 아는 바가 없다. 장군 진급은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의 권한일 텐데, 당시는 하나회를 척결한 김영삼 대통령 시절이었다.  
  • 교회 신자인 신임 비행단장이 새로 부임할 즈음, 성당에 잘 다니던 일부 젊은 장교들이 신부님을 찾아와 앞으로 교회 나가게 되었다고, 거기에도 하나님이 있지 않냐고, 신부님께 죄송하다고 했다고 한다. 신부님은 이해한다고 하셨다. 군인들에게 특히 장교들에게 진급은 목숨과도 같은 것인데, 그들은 일요일에 교회 출석해서 눈도장을 찍어야 했다. 

내가 알고 있는 한, 한국 군에서 가장 먼저 들어선 종교시설은 교회였다. 뒤 이어 성당이 생기고, 법당은 가장 천천히 들어갔다. 동국대 불교학과가 없었으면, 군종장교를 구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군 복무 목회자들에게 공군은 경쟁률이 상당히 높았다. 육군에 비해 시설도 좋고 편하기 때문이었다.  

 

법정 공휴일도 마찬가지다. 크리스마스가 가장 먼저 공휴일로 지정되었다. 한참 후에 불교계 인사의 헌법소원을 거쳐 부처님 오신 날도 공휴일이 되었다. 독립을 쟁취한 이승만 정권의 인사들은 대부분 친일인사들이면서 미국의 눈치를 보아야 했기 때문에 개신교에 아주 우호적인 입장이었다. 그 뒤의 군사정권들도 마찬가지였으며, 70년대 개신교의 광풍이 전 국민을 휩쓸었다. 불교는 올드패션 느낌의 곰팡내 나는 구닥다리로 인식되기 충분했다. 그 당시 교회 다니는 것은 하나의 패션이나 다름없었다. 오해 말기 바란다. 패션이라고 한 뜻은 가볍다는 뜻이 아니라, 광풍이 불었다는 뜻이다. 현재 한국기독교의 주류 대형교회들이 다 이 즈음에 몸집을 크게 불렸다.

 


제대 후부터 독일 이민 전까지(1996~2009년)

제대하자마자, 학교 근처 절을 수소문해서 청년부가 있을 만한 2개 도심 사찰을 방문해보고, 여러 군데 전화도 했지만 헛수고였다. 젊은이들은 더 이상 불교에 관심이 없었다. 청년부가 제대로 활동하는 도심 사찰은 적어도 나의 생활 반경에는 없었다. 당시는 인터넷도 없고, 핸드폰도 없던 시절이다. 


대학 4학년 때, 아버지가 종합병원에 6개월 정도 입원해 지내셨다. 심하지 않은 병이었는데, 병원에서만 돌아다닌다는 슈퍼 박테리아에 감염되셔서 엄청난 고열에 시달리셨다. 당시에 나는 공부 핑계로 주말에만 병원에 가곤 했는데, 6인 병실에 외국인 신부님과 목사님 일행이 가끔 찾아오곤 했다. 벽안의 신부님은 천주교도 환자의 손을 꼭 잡으시고 눈을 감고는 누워있는 신도에게만 들릴만한 목소리로 조곤조곤 기도하시고는 우리들에게 가볍게 목례하고 조용히 나가셨다. 목사님과 그 신도들은 요란스럽게 인사를 하고, 접견 온 환자를 에워싸고는 큰 목소리로 기도를 하고 노래를 부르며 옆 침대에서 쉬거나 자고 있는 환자들을 짜증 나게 만들었다. 내 입에서는 그들에게 닿지 않을 만한 목소리의 쌍욕이 저절로 나왔다. 아버지가 말리곤 했다. 


대학 졸업 후 맞은 IMF 시대, 취직, 결혼, 퇴사, 사업, 재취업 등 20대 후반에서 30대 중반의 한국인 남자가 겪을 만한 일반적인 삶의 궤적을 크게 벗어나지 않은 나는 불교와의 인연을 잠시 접었다.  

 

결혼하면서 더더욱 종교와는 멀어진 삶을 살았다. 와이프는 아주 독실하지는 않지만 천주교 신자다. 우리는 주말에 종교시설에 가지 않았다. 

 

불교신자는 어딜 가도 아웃사이더 취급을 받는다. 젊은 청년 중에 불교신자가 별로 없기도 하고, 불교신자더라도 굳이 티를 내는 사람은 별로 없다. 우리 집안이나 처가 집안에서 나 혼자 불교 신자다. 어머니는 초파일에만 불 밝히며 가족의 무사안녕을 비는 분이다.  


독일 이민, 새로운 종교 경험

독일 파견이 결정되고 준비하면서, 가족들이 거주하게 될 지역 주변의 종교시설을 알아보게 되었다. 아내를 위해 한인성당들의 위치를 파악하고 해당 카페에 글을 남기기도 했다. 혹시나 하고 한국 절이 있는지도 알아봤다. 독일에 거주하게 되면 시간 여유가 있으니 한국 절에도 다닐 수 있겠다 싶었다.  

 

독일의 한국 절에서 환희와 좌절을 맛보다

웬일인가 싶게도, 조계종 산하 한 종파에서 운영하는 절이 꽤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 종파를 일구신 분이 비구니 스님(=여승)이신 영향으로, 소속 모든 스님이 비구니 스님이셨다. 독일의 선원에는 세 분의 스님들이 상주하고 계셨다.

 

고맙게도 천주교 신자인 와이프가 일요일에 절에 함께 따라갔고 법회도 참석했다. 그 절에서 하는 법회는 오전 10시에 시작했는데, 모든 의식은 1시 반은 되어야 끝이 났고 늦은 점심식사를 마치고 먹은 것을 치우고 법당 일을 거들다 집에 오면 저녁이 되기 일쑤였다. 와이프는 선원 주방에서 뒤늦게 시집살이 경험을 1년 넘게 하게 되었다. 

 

처음에 우리 가족은 좋은 환대를 받은 편이었다. 법회 중에는 의례적인 의식 외에도 마음공부라는 타이틀로 한 시간 이상 공부하는 시간이 었었고, 인생 처음으로 불교 공부 기회를 가졌다. 그러나, 좋은 시절은 1년 반 이상 지속되지 못했다. 선원의 스님들이 유교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암암리에 돈을 밝히면서 마음공부를 가르친다고 나 스스로 의심하게 되었다.

 

한 번은 다리를 저는 은퇴한 광부가 일요일 법회에 참석하셨다. 나는 이런저런 이야기도 해드리고 법당 정보를 드렸다. 그분이 2~3번 참석한 한 달 정도 뒤에 법회를 주도하는 스님이 총무 보살님께 그 은퇴한 광부 할아버지에게 차 한잔 대접하고 이야기 나누라고 하셨다. 그 광부에게는 목례 인사 외에 말을 건네시지 않았다.

 

비슷한 시기에 여의사 한분이 법회에 새롭게 나오셨다. 그 날 스님은 법회 뒤에 그 여의사분을 자신의 별채로 모셔 장시간 차 담화를 나누었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광부 할아버지와 친하게 지낸 나는 절에 대해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되었는데, 신도가 별로 없는 그 독일 선원이 운영되는 자금은 신도들이 아주 가끔씩 하는 '천도재'에 있었다. 나는 다른 신도들에게 왜 천도재를 해야 하는지를 꼬치꼬치 캐물었다. 나의 의문이 스님의 귀에 바로 들어갔다. 그즈음부터 스님이 나를 법회 안팎에서 살포시 누르기 시작했다.

 

천도재란 돌아가신 조상을 위해 드리는 제사의식으로 소위 뭉칫돈을 절에 드리고 치르는 의식이다. 뭉칫돈이 얼마인지는 독일 선원의 경우 정해져 있지 않았다. 뭉칫돈의 양이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현금성 자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인지 아닌지에 따라 천도재를 올리는 신도의 성의 값이 매겨진다.  

 

주위 신도들이 좋은 말로 한 마디씩 나를 위로해주었다. 그분들도 스님이 나를 타깃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누구도 내게 이래라저래라 하지 않았다. 눈빛으로 그분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결정은 나의 몫이었다. 나는 누구의 손에 떠밀려 뭔가를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절에 발길을 끊었다.

 

불교에 대한 회환이 밀려왔다. 본격적으로 마음공부에 눈을 떴다고 생각했는데, 현실에서는 결국 돈을 요구받는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천도재는 불교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한국의 전통 제례의식이다. 그러나, 지금도 전국의 많은 절에서는 천도재로 짭짤한 수입을 올리고 있다. 


절에 나오는 신자 중에 독일인이 한 명 있었는데, 그가 귀신을 본다는 사실을 여러 사람들이 내게 말해주었다. 법당에 나오기 시작한 초창기에 그는 수 차례 다른 신도들의 천도재 의식에 참석했었다는데, 스님이 천도재 의식을 진행하다 보면 어느 순간 후손의 조상인 듯한 귀신들이 불려 나온다고 내게 직접 말해줬다. 그 친구는 스님을 싫어했다. 스님의 유교적인 장유유서 마인드를 그 독일인은 지독히 싫어했다. 그래서, 나는 그의 말을 더 믿게 되었지만, 귀신에 대해서는 나도 쉽사리 믿기가 어려웠다. 설사 내가 천도재를 올리고 스님이 천도재로 내 조상을 불러내어 영혼을 달래어, 마침내 구천을 떠돌고 있는 나의 조상이 좋은 곳으로 간다고 하더라도 그것과 내가 하고 싶은 불교 마음공부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선업과 악업은 짓는 대로 받는 것이 공평할진대, 악업을 쌓았는데도 불구하고 자식이나 후손의 천도재로 악업을 탕감받거나 씻어낸다면 그것은 불공평한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부처라는 존재가 그런 낮은 수준의 존재 일리가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돈이 필요하면 솔직하게 신도들과 의논하고, 신도를 더 모으거나, 선원에서 돈이 될 만한 사업을 하거나,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더 좁은 곳으로 이사 가거나 하면 되는데, 몇 안 되는 신도 가족의 현금을 천도재라는 이름으로 받는 현실이 너무 서글펐다. 불교는 다르다는 나의 자존심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절이 싫으면 스님이 떠나는 것이 아니라, 절은 스님의 차지였고, 신도인 나는 돈 값을 지불하기를 거부했기에 떠났다. 

 

그때 마음공부를 하면서도 확실하게 잡히지 않던 무의식(마음)의 작용에 대한 개념은 선원을 다니지 않게 될 즈음부터 접하게 된 법륜스님의 유튜브 강의를 통해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 법륜스님의 가르침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성당에 아내를 데려다주다

절에 다니는 것을 멈추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뒤에 와이프는 성당을 나가겠다고 했다. 나는 두말없이 따라가 주었다. 단, 나는 절대 미사는 보지 않겠다고 했고 와이프는 내 이력을 잘 알기에 아무 토를 달지 않았다. 일말의 기대도 하지 않았다.

 

어린 아들은 엄마 손을 잡고 미사에 참석하고 세례도 받고 첫영성체도 받았는데, 내가 모두 순순히 동의해주었다. 지금 그 아들은 더 이상 성당에 나가지 않는다. 독일에서는 만 15 세부터인가 종교의 자유가 있다고 법에 정확히 명시되어 있다. 학교에서 그 사실을 알게 된 아이는 더 이상 성당에 나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내가 종교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해준 덕분이기도 하다. 아들은 나중에 나와 함께 한국의 템플스테이에도 한 번 참석해보고 싶다고 했었다. 지금도 변함없는지는 모르겠지만, 작전 성공이다. 나는 우리 아이가 모든 종교에 열린 마음을 가지되 어느 종교에도 예속되지 않는 인간이기를 바랐다. 천주교 세례도 받았으니, 아이가 원한다면 나중에 절에서 수계도 받고 불교 이름도 갖게 할 참이다.  

 

독일의 한인 성당에서는 매달 반모임을 구역별로 돌아가며한다. 2017년 어느 날인가, 우리가 새로 이사 온 집에서 있은 반모임에 오신 신부님이 짤막한 의식을 진행해 주셨다. 새로운 집과 가정에 축복이 있기를 바라는 기도 같은 것이었다.  

 

요즘 와이프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성당에 간다. 40분 정도 걸리는 거리를 내가 직접 운전해서 데려다준다. 와이프도 운전할 수 있지만, 겁이 많고, 혼자 다니는 걸 지극히 싫어한다. 덕분에 나는 근처 버거킹에서 커피 한 잔 시켜놓고 핸드폰도 보고, 책도 읽고 근처 산책도 하는 개인 시간을 가진다. 

 

가끔 어쩌다 성당 행사에 참석하는 경우가 있다. 처음에는 성당에 나오라는 분들의 한마디 한마디가 정말 싫었지만, 이제는 그냥 그러려니 한다. 하지만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아직도 기분이 별로다. 아직 철이 덜 들어서 그렇다. 

 

새해가 되면, 나는 어느새, 독일의 한인성당의 그 해 최고 난이도 목표가 되어 있다. 나는 절대 안 넘어온다고 와이프가 성당 분들께 말씀드려도 그분들은 또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는가 보다. 역사가 증명한다고 했다. 실제로 무교였다가 와이프 따라 성당을 나가기 시작한 나이 드신 남자분들이 꽤 많으시다. 나이 들면 죽음이 더 이상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인 거 같다. 인간은 나약하다.  

 

이민사회와 종교

아실지 모르겠지만 해외교민들에게 성당이나 교회는 이민자 가족들끼리 정도 나누고, 현지인들 욕도 하고, 삶의 정보도 교환하는 등의 순기능이 많다. 신도들 간의 종교적인 색채도 한국의 그것과는 비교도 안되게 옅다. 한국에서 교회 신자들에게 수도 없이 흥분했던 나도 독일에서는 마음을 풀 수 있다. 

 

나는 독일에 살면서 은퇴하신 목사님 부부의 안내를 받으며 여행을 한 적도 있고, 지금은 3년이 넘게 한 목사님과 테니스를 치고 있다. 독일에서 내가 아는 지인 중에 불교신자는 거의 없다. 대부분 교회를 다니고, 일부는 성당을 다닌다.

종교시설에 정기적으로 다니지 않는 사람은 회사 파견으로 3~4년 단기로 머무는 가족이거나, 개인사로 한국 교포사회에서 스스로 멀어지고 싶어 하는 가정들 정도인 듯하다.

 

종교시설과 아이들의 주말 한글학교가 한국인들의 주요 소통의 장인 셈이다.  

 

 

맺음말

종교에 관한 나의 개인적인 소회가 다른 사람들에게 무슨 득이 있을까 싶다. 괜히 아까운 님들의 소중한 시간만 뺐았다.

 

내 삶에서 종교란 무슨 의미인가? 잘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내 가치관의 정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뿐이다. 


현대사회가 점점 진화할수록 종교의 의미는 퇴색되기 마련이다. 반면, 정신적으로 더 힘들어지는 인간들에게 종교가 의지처가 되어줄 수도 있다. 인간은 어쨌거나 나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와 처음 대면하거나 깊이 사귀지 않은 누군가가 대화중에 종교이야기가 나오고 연이어 나의 중교에 대해 물어보는 경우가 이따금씩 있다. 대개 이런 식으로 질문한다

 

'불교를 믿으세요?'

나는 답한다. "맞긴 한데, 불교는 뭘 믿는 종교가 아니에요".  

질문한 사람이 멀뚱히 나를 쳐다본다. 대부분 추가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이다. 할 수 없이 나는 좀 길게 대답한다. 

 

"불교는 누굴 믿는 종교가 아닙니다. 믿는 것을 종교라고 정의한다면 불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그런 면에서 불교를 마음의 작용을 공부하는 심리과학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불교신자라고 묻는다면 예, 저는 불교신자입니다".

 

물론 사람 봐가면서 짧게 '예'라고만 대답하기도 한다. 불교에 거부감이 없을 법한 사람들에게는 길게 설명해준다.  


석가모니, 부처, 고타마 싯달타, 붓다, 여래, 세존, 아라한, 정각자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그분을 내가 존경하게 된 결정적인 한 문장이 있다.

 

그가 그의 제자들에게 한 말이다.

 

"내 말을 의심하라. 항상 되새기고 의심하라"

 

부처는 그 자신이나 자신의 말을 믿으라고 제자들에게 말한 적이 없다. 의심하라고 했다.

 

끝내주는 스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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